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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구의 역사_ 동명유래

숭의동
숭의동은 본래 인천부 다소면 장천리와 독거리 등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장천리, 여의리, 독거리를 병합하여 장천과 여의의 이름을 따서 "장의리"라고 하고 부천군 다주면에 편입시켰다.
그 후 1936년 일제치하 제 1차 인천부역 확장때 다시 인천에 편입되어 대화정으로 명명되었다.
1946년에는 해방을 경축하는 뜻에서 숭의동으로 개칭하였고 넓은지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숭의 1, 2, 3, 4동으로 분리하였다. 그러나 1955년에는 숭의동이 금곡동과 통합되는 등 변천과정을 거쳐 1970년에는 다시 4개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여우실(현 남구청사 부근)과 독갑다리가 있다.

이후 2009년에는 숭의1동과 3동이 통합되어 현재는 3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현동
용현동은 원래 다소면 소속의 동명이 비랑이라 불리웠고 1903년 8월 인천부 관내 동리명을 확정지을 때 독정리, 비랑리로 구분되었으며 1906년 5월 인천부가 동리명을 개정할 때 독정리, 비룡리로 개칭되고 그 후 1914년 3월 1일 부천군이 관할 동리명칭을 개정할 때 비룡리의 "용"자와 독정리의 "정"자를 따서 용정리가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1937년 1월 15일 인천부가 정회규정을 제정 시행할 때 일본식 정명 일지출정으로 개칭하였으며 1946년 1월 1일 해방직후 용현동이라 개칭하였다. 1950년 1월 15일 인천시가 동을 증설할 때 용현 1, 2동으로 구분하였다.

독정이란 구한말에 글을 가르치던 서당인 정자가 있어서이고, 비랑이란 파도가 나른다는 뜻이다.

용정이란 비룡리의 "용"과 독정의 "정"자를 각기 따서 지은 리명이다.

용현이란 용이 나타났다는 뜻으로 이 마을 용골에 지명을 이용한 것이고 일본식 정명 일지출정은 일본에서 많이 쓰여지는 해뜨는 고장임을 뜻한다.

1968년에 동부동과 서부동으로 분동하였고, 동세의 확장에 따라 1979년에는 4개동으로 발전하였으며, 1980년에는 5개동으로 분동되었다.

이후 2009년에는 용현1동과 용현4동이 통합되어 현재는 4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익동
학익동은 주변 산의 형세가 학의 날개를 펼친 형상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곳에는 지석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인간이 정착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유서깊은 지역이기도 하다. 부여시대부터 문학산 기슭에 [장자골]이란 부락이 있었고 백제시대에도 햇골부락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을 이루고 정착하여 살기도 하였다. [햇골]이란 조개산지를 뜻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은 해변에서 가까웠던 곳으로 추측되고 있다.

조선시대(숙종 10년)에는 부평 이씨문중의 일부가 낙향하여 [장자골]옆에 정착, 부락을 형성하였으며 그 문중에는 제운 선생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그 분의 덕망을 기리기 위해 한때는 "제운리"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부천군 문학면 학익리였다가 1936년 제 1차 인천부역 확장때 인천부에 편입되어 "학정리"라 하다가 해방후 1946년 학익동이 되었다.
도화동
도화동은 원래 다소면 베말, 일명 쑥골, 도마다리라 불리우다가 1903년 8월 인천부가 동리명을 확정할 때 화동, 도마교리였던 것을 1914년 3월 1일 부천군이 신설되고 다소면과 주안면이 통합되어 다주면이 된 직후 인천관할 동리의 변동이 있을 때 1914년 11월 20일 도화리로 개칭되었으며 1937년 1월 15일 정회규정 제정시행시 일본식 정명 앵정으로 개정하였다가 1946년 1월 1일 해방직후에 도화동으로 개칭하였다.

화동이란 벼마을을 뜻하며 일명 쑥골이라 불리웠고, 도마교리란 경인도로가 개설될 때 말이 지나 다니는 다리마을이라는 뜻이고 수봉공원 진입로 일대를 일컷는 옛지명이다.

도화리란 도마교리의 "도"자와 화동이란 "화"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고 일제 때 앵정은 일본의 국화인 사꾸라꽃을 상징하는 정명이다.

쑥골은 현 선인체육관 주변의 옛농가 마을로 쑥골동산을 넘으면 [번저기나루]가 있어 개건너와 연결되는 동네이다.

이후 1977년에는 도화2, 3동을 분동되었으며 2009년에는 도화2동과 도화3동이 통합되어 현재는 2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안동
주안동은 원래 인천부 다소면 충후부와 사미(시미라고도 부른다)마을이었다.

1903년 8월 인천부가 동리명을 확정할 때 충훈부리, 사미리로 불리우다가 1906년 5월 동리명 개정으로 충훈리, 사미리로 하고, 1914년 3월 1일 부천군이 신설되고 동년 4월 1일 주안면과 다소면을 통합해서 사충리가 되었는데 1936년 10월 1일 사충리가 인천부에 편입된 직후 간석동의 일부와 관교동의 일부를 편입하여 주안정이라 개칭하였다.

1946년 1월 1일 해방직후 동명을 주안동이라 개칭하였으며 1950년 1월 9일 동명분할로 주안1, 2동으로 구분되었다.

충훈이란 이 마을에 옛 조선시대 정부기구인 충훈부의 방죽이 있어서이고, 사미리란 아름다운 선비라는 뜻이다. 구한말의 이조판서 이헌경의 출신 마을을 뜻한다. 사충이란 사미리와 충훈리를 합한 이름이다.

주안은 원래 석바위 뒷산이 주안산이고 이산의 흙색이 붉고 산형태가 마치 기러기가 내려앉는 것 같다해서 주안산인데 옛날 지금의 간석동, 구월동을 합쳐 산이름을 따서 지은 면명이다. 경인철도가 개통될 때 간석동에 주안역을 처음 설치해서 주안역이라 하다가 지금의 주안동으로 역사를 이전하고도 그대로 주안역이라 부르고 또한 주안염전을 설치해서 주안동이 된 것이다.

주안은 1970년대에 5개동이다가, 1980년대에 다시 8개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교동
관교동은 고려시대 인천부의 중심지의 소재지이다. 그래서 읍내로 통용되었다.

근세에 와서는 읍내, 승기부락으로 구분되고 1903년 8월에 동리명 개정으로 읍내리 동촌승기리가 되고 1906년 5월 동리명 개정으로 읍내리를 관청리, 향교리, 승기리로 또한 승기리는 대승기리, 소승기리로 각각 분할되었다.

1914년 3월 1일 부천군 설치 후 동년 4월 1일에 문학면 관할로 되고 1914년 11월 20일에 관청리, 향교리가 통합 관교리가 되고 대승기리, 소승기리가 통합하여 승기리가 되었다.

1917년 6월 19일 부천군 관할 동리 개정으로 관교리의 승기리를 통합하여 관교리가 되었는데 1936년 10월 1일 부천군의 일부가 인천부에 편입될 때 관교리의 일부(승기부락)가 인천에 편입되어 주안정의 일부가 되었다가 1940년 4월 1일 문학면이 인천부에 편입될 때 일본식 정명인 원정으로 개칭되었다.

읍내 관청리는 관청이 있는 소재지를 뜻하고, 향교리는 향교가 있으므로 이름하였고, 관교란 관청과 향교가 있음을 뜻한다. 승기란 옛날 고개에 사람이 살다가 폐동이 되었다가 다시 마을기지가 이어져서 승리라 불리었다고 전한다. 원정은 원부 소재지를 뜻하고 해방직후 1946년 1월 1일 원정을 관교동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1992년 관교지구 택지개발 사업으로 인한 대단위 아파트 신축으로 인구가 집중되어 96년 3월 1일 문학동에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학동
문학동은 문학산에서 유래된 인천부의 소재지로서 인천의 뿌리가 서려있는 곳이다.

1927년 지석묘의 발굴로 미루어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선조들이 정착한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곳 문학산은 미추홀 왕국의 발상지로서 유서깊은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또한 이 지역은 인천도호부청사의 일부가 남아있고(현 문학초등학교내) 인천향교를 비롯해 학산 서원터, 하늘에 제를 올리던 수천현고개, 삼호현 (능허대를 거쳐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일행을 전송하던 고개로 전송객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사신일행을 크게 세번 불렀다는 곳)등이 있다.

특히 이곳은 고려조의 칠대어향으로서 일찍이 인주로 승격되어 발전하기도 하였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되면서 감리서가 생겨나 내리로 옮겨감에 따라 급격히 쇠퇴하였다.

1914년 행정지역 개편때 부천군 문학면 관교리로 통합 후 1936년 제 1차 부역 확장 때 다시 인천부로 편입되어 문학정이 되었고, 1946년 관교동으로, 1977년 문학동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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